Kitap · 무정
Sayfa 236 / 374
Yazar: 이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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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형식은 고개를 숙이고 가만히 앉았다. 목사는 웃으며 부채질만 한다. 노파는 형식이 왜 '녜' 하지 않는가 하고
공연히 애를 쓴다. 우선은 일전 안동서 형식과 말하던 것을 생각하고 혼자 빙그레 웃는다. 모두 다 기뻐하는 속에 형
식 혼자는 남모르게 괴로워한다. 목사는,
"자, 생각하실 것도 없겠구려, 어서 대답을 하시오."
"일후에 다시 말씀드리지요. 아무려나 저 같은 것을 그처럼 생각하여 주는 것은 어떻게 황송한지 모르겠습니다."
"일후를 기다릴 것이 있어요. 그러고 오늘 오후에 나하고 김장로 댁에 가시지요. 같이 저녁을 먹자고 그러시던데."
형식은 어찌할 줄을 몰랐다. 평양도 가야 하겠지마는, 김장로의 집 만찬에 참여하는 것이 더 중한 것 같기도 하였다.
그러나 지금까지 영채의 시체를 찾아가기로 결심하였던 것을 버리고 금시에 선형에게 취하여 '녜' 하기는 제 마음이 부끄
러웠다. '선형과 나와 약혼한다'는 말은 말만 들어도 기뻤다. 영채가 마침 죽은 것이 다행이다 하는 생각까지 난다.
게다가 '미국 유학!' 형식의 마음이 아니 끌리고 어찌하랴. 사랑하던 미인과 일생에 원하던 서양 유학! 이 중에 하나
만이라도 형식의 마음을 끌 만하거든, 하물며 둘을 다! 형식의 마음속에는 '내게 큰 복이 돌아왔구나' 하는 소리가 아
니 발할 수가 없다. 형식이가 괴로운 듯이 숙이고 앉았는 그 얼굴에는 자세히 보면 단정코 참을 수 없는 기쁨의 빛이
있을 것이다. 처음에 목사를 대할 때에는 형식의 얼굴에는 과연 괴로운 빛이 있었다. 그러나 한 마디 두 마디 흘러나오
는 목사의 말은 어느덧에 그 괴로운 빛을 다 없이하고 어느덧에 기쁜 빛을 폈다. 마치 봄철 따뜻한 볕에 눈이 일시에
다 녹아 없어지고, 산과 들이 갑자기 봄빛을 띠는 것과 같다. 그래서 형식은 고개를 들지 못한다. 남에게 기쁜 빛을
보이기가 부끄러움이다. 형식은 힘써 얼굴에 괴로운 빛을 나타내려 한다. 그뿐더러 일부러 마음이 괴로워지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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