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 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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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이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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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은, 영채는 죽은 사람으로 작정하고 계향의 집에 돌아와, 노파는 이삼 일 평양에 있는다 하므로 자기 혼자 그날 저
녁차로 서울에 올라왔다. 평양을 떠날 때에 노파는 문 밖에 나와 형식의 손을 잡고 울면서,
"아무리 하여서라도 영채를 찾아 주시오" 하였다. 그러나 형식은 다만 계향을 떠나는 것이 서운할 뿐이요, 영채를 위하
여서는 별로 생각도 아니하였다. 형식은 차 속에서 '꿈이 깬 듯하다' 하면서 여러 번 웃었다.
평양서 올라올 때에 형식은 무한한 기쁨을 얻었다. 차에 같이 탄 사람들이 모두 다 자기의 사랑을 끌고, 모두 다 자기
에게 말할 수 없는 기쁨을 주는 듯하였다. 찻바퀴가 궤도에 깔리는 소리조차 무슨 유쾌한 음악을 듣는 듯하고, 차가 철
교를 건너갈 때와 굴을 지나갈 때에 나는 소요한 소리도 형식의 귀에는 웅장한 군악과 같이 들린다. 형식은 너무 신경이
흥분하여, 거의 잠을 이루지 못하고 차창을 열어 놓고 시원한 바람을 쐬면서 어스름한 달빛을 어렴풋하게 보이는 황해도
연산(黃海道 連山)을 보았다. 산들은 물먹으로 그린 묵화 모양으로, 골짜기도 없고 나무나 돌도 없고, 모두 한 빛으
로 보인다. 달빛과 밤빛과 구름빛을 합하여 커다란 붓으로 종이 위에 형체 좋게 그린 그림과 같다 하였다. 이렇게 생각
하는 형식의 정신도 실로 이와 같았다. 형식의 정신에는 슬픔과 괴로움과 욕망과 기쁨과 사랑과 미워함과, 모든 정신 작
용이 온통 한데 (모이고 한데) 녹고 한데 뭉치어, 무엇이 무엇인지 구별할 수가 없었다. 비겨 말하면 이 모든 정신
작용을 한 솥에 집어넣고 거기다가 맑은 물을 두고 장작불을 때어 가며 그 솥에 있는 것을 홰홰 뒤저어서 온통 녹고 풀
어지고 섞여서, 엿과 같이 죽과 같이 된 것과 같았다. 그러므로 이때의 형식의 정신 작용은 좋게 말하면 가장 잘 조화
한 것이요, 좋지 않게 말하면 가장 혼돈한 상태러라. 엷은 구름 속에 가리워진 달빛이 산과 들을 변하여 꿈과 같이 몽
롱하게 만든 모양으로, 그 달빛이 형식의 마음에 비치어 그 마음을 녹이고 물들여 꿈과 같이 몽롱하게 만들어 놓았다.
형식의 눈은 무엇을 보는지도 모르게 반작반작하고 형식의 머리는 무엇을 생각하는지도 모르게 흐물흐물한다. 형식의 몸은
차가 흔들리는 대로 흔들리고 형식의 귀는 무슨 소리가 들리는 대로 듣는다. 형식은 특별히 무엇을 생각하려고도 아니하고
, 눈과 귀는 특별히 무엇을 보고 들으려고도 아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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